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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갈때마다 처음 느껴지는 감정은 "...할 말..없다..."이다.

공항에서 내리자마자 리무진 버스를 타러 가는 동안에도 벌써 서너번의 꾸벅이는 인사를 받고(전혀 모르는 사람들...예를 들면 세관검사원이나 버스티켓 판매원 혹은 짐을 실어주는 리무진 버스도우미등...),나를 도와주고 싶어 안달이 나있는 것만 같은 사람들의 홍수처럼 밀려오는 친절에 어안이 벙벙한 상태의 일 주일가량이 지나면 "할 말..없다.."는 감정이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케부쿠로 한 복판에 나가 "꺄~~~악!!!" 하고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으로 바뀌어진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라기보다는 사실 몇 가지 이유가 있긴 하다.

어딜봐도 한 군데 흐트러진 곳이 없고, 먼지 하나 발견하기 어렵고,누구 하나 큰 소리로 얘기하지 않는 것 등등..."참 신기하지..."혼자 구시렁 거리면서 나도 몰래 호텔이나 식당에 가면 어디 먼지 없나...하고 면밀히 살펴보다가 커피 메이커 덮개위라든지,블라인드 커텐의 한쪽 모서리에서 덜 닦여진 먼지자국이라도 보게 될라치면 마치 오래 쫒던 범인 이라도 붙잡은 형사라도 된 양, 회심의 미소를 짓게된다.

그러면서 또 그런 식으로 되어가는 내가 한편 이상하기도 하면서... 약간 복잡한 심경이 되어가곤 한다.

아침 출근 길의 지하철을 탔다가 가슴에 매달고 있던 선글라스가 짓이겨 질정도로 사람들이 들이닥치자,"어..어! 아이쿠!!"를 연발하다 주위를 보니,다들 마치 아무렇지도않다는 듯,눈썹하나 깜박이지 않고 조용히,완벽하게 쾌적한 모습들로 짓이겨지고들 있었다.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신간센 열차를 타고 가는데,어떤 괴상한 차림의 남자가 열차 한 복판에 흰장갑을 끼고 서서 각 역마다 열차 안내방송이 나오기 약 10초 전에 안내방송과 정확하게 똑같은 말과 억양으로 선수쳐서 방송(?)하고 있었다...이렇게 웃길수가...나는 킥킥거리며 웃다가 거의 걷잡을 수 없이 몸을 비틀며 웃기 시작하는 단계로 넘어가다가 더 큰 충격적인 모습을 보고 웃음을 뚝 그치고 말았다.

그 객차 안의 모든 승객들 중 오직 나 혼자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다 들 웃음을 참고 있다는 표정만 보였어도 좀 덜 충격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마치 tea ceremony 라도 하고있는 양,약간 머리를 수그린 채 심각하고 얌전한,거의 경건한 사람들의 모습에 약간 착란적인 현상을 보이는그 흰장갑의 사나이에게서 받은 충격이상으로 나는 놀랬다.

이케부쿠로 시내 한 복판에서 고함치고 싶어지는 이유는 주로 이러한 상황들이 며칠 계속 되고 난 후의 내 심리상태를 말해 주고 있을 것이다.

1993년부터 거의 해마다 일본에 다녀오고 있었음에도, 내가 일본과 그 곳 동료들을 진심으로 마음 속에 받아들이게 되기 까지는 거의 십년이라는 세월이 족히 걸렸다.

처음 갔을 때부터, 놀랍게도 많은 고음악 연주자들과 그들의 다양한 연주들과 페스티벌등등...을 접할 때마다,마치 포르투갈에서 들여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정도로 살살녹게, 표현 할길 없이 만들어내는 그들의 카스테라나, 프랑스에서 먹어본 가장 맛있다는 크렘뷸레보다도 더 맛있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던,동경의 한 카페의 크렘뷸레를 먹게되었을 때 느꼈던 알 수없던 실망과 배반감...부러움이라고는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이런 야릇한 감정이 늘 내 속에 있어왔던 것 같다.

마치 내가 식당의 한 구석에서라도 먼지를 찾아보려 눈을 부릅뜨고 훔쳐보고 다녔던 것처럼, 실망하기를 기대하며 일본에 다녔던 의식의 일부가 내게 있었음을 부인할 수없다.

그들의 협동심,부지런함,친절함의 정도는 거의 현실적이지 않은 것만 같았다.

그러나,몇년 전부터인가 그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고 진심어린 언행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새삼 그 곳 사람들과 연주자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되고,더욱 스스럼없이 친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내게 한번도 앞뒤가 다르게 말하거나 행동 하는 적이 없었다는 것,그리고 진심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이 깊이 생활화 되어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번 여행은 그 동안 수차례에 걸쳐 연주해 왔던 텔레만의 실내악 곡들을 모아 하나의 CD로 녹음하는 작업과 헨델의 메시야 전 곡을 연주하는 일이었다.

녹음에는 일곱 명의 연주자들이 다양한 곡들을 연주하였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야마나시현의 마키오카라는 작은 도시에 있는 하나카게 홀은 항상 경이감을 주는 놀라운 연주 홀 중의 하나로서 많은 연주자들이 음반 작업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 작은 시골에 이런 홀이..."이런 부러움과 놀라움이 섞인 느낌은 일본에서 종종 갖게된다.

홀 바로 앞에는 이 고장 특산품인 포도가 주렁주렁한 밭이 있고,작은 길을 건너면 유치원이 산을 마주보며 예쁘게 지어져있었다.

가끔 휴식시간에 나와서 보게되는 아이들의 놀이터,카랑하고 예쁜 목소리의 합창소리는 마음에 큰 위로를 주곤했다.

이번녹음은 프로듀서없이 연주자들이 엔지니어들과 함께 작업을 하게되어서 어떤 점에서는 시간이 많이 절약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Paris Quartett No.6 마지막 악장,마지막 두어 줄에 이르러서는 나의 끈질긴 고집이 발동,수십번을 해도 끝이 나지 않았다.

나는 그 반음으로 상행하는 몇 소절과 마지막 프레이즈에서 천국으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완전히 초월된 영원의 느낌을 꼭 표현해보고 싶었다.

박자나 마디,심지어 강약도 중요하지 않고,평행으로 이어지는 멜로디에서 오직 영원으로 이어지는 여운을 표현하자고 하면서 하고...또 하고...듣고. 또 하고...수차례 반복하였다.

결국 끝을 내어야 했고,완전한 만족은 아니었으나 "우리모두가 같은 느낌을 추구하고자 했다..."라고들 위로하며 녹음은 끝이 났다.

밤이 캄캄하여 혼자 밖에 나와보니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도 귀에 맴도는 그 마지막 소절이 깊은 상념과 함께 영원에 대한 말 할수 없는 동경을 불러일으키자 돌아가신 아빠생각에 한없이 눈물이 나왔다...

"삶과 죽음의 거리는 이렇게도 가깝게 느껴지는데,왜 이렇게 멀까,육체와 영혼의 거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 많은 그리운 사람들이 있는데,나는 이렇게 멀리 있을 수밖에 없음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리고 곧 이어진 동경에서의 메시야 연주.

오카다씨가 해마다 구성하는 오케스트라 "Musica Reservata"의 초청으로, 낯익은 많은 연주자들과 함께하여 편안하고 즐거운 리허설이었다.

단지, 별로 타협적이지 않은 보잉,최대한 노래와 어울리는 보잉으로 가길 나는 원했고, 현악기 주자들이 처음에 생소해하며 악보에 바꿔적느라 바빠했지만,연주 때는 아주 성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인상적인 것은 합창단이었다.

평균연령이 60이라는 그 합창단원들의 모습과 열심,그리고 실력...이 감동을 주었다.

한점 흐트러짐 없이 어우려졌던 메시야 전곡연주는 그들 특유의 cooperation과 concentration의 극치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연주였다.

이번 12월3일 우리의 메시야 연주도 전곡으로 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주 후,파티가 있었다.

한 번의 큰 연주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보이지 않는 수고가 있어야하는지를 알게 해주는 시간이다.

뒤에서 수고하는 준비위원들,합창 지도자,합창 반주자,지휘자는 물론이고 연주자들 개개인이 얼마나 기쁘게 참여하고 그들의 인생이 이러한 시간에 얼마나 많은 가치를두고 열심히 준비하는가를 알게하게 하는 시간이었고,모두들 참으로 기쁘게 웃고,장기자랑도 하며 먹고 놀았다.

그 중 특별히,카운터 테너인 우에스기씨는 나를 위해 한 곡 부른다며 "아리랑"을 기가 막히게 불러주었다...참으로 인상적인 노래가 되어 가슴에 와 닿았다...

"Messiah" by Noriaki Ikeda

또 한명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이번 메시야 연주회 포스터를 디자인 했던 이케다씨였다.

그림도 참으로 인상적이었지만 그의 인생도 인상적이다...

공학도로 졸업 후 큰 선박회사에서 13년을 일해오던 어느 날,서서히 시력을 잃게 된다는 불치의 병을 판정받고는 시력이 있는 동안 보이는 것들을 그리겠다고 결심하고 그림을 그리기시작했다고 한다.

이번 연주의 합창단원이기도 한 그는 내 헨델 CD와 그의 작품을 서로 주고받기로 하고 여러점의 그림을 선물로 주었다.

그는 내 헨델 연주에 "affection,sadness,humor,feeling of violation,will power..."등등의 감정이 있음을 깊이 느낀다며 자신의 한 그림에서 표현 한 여러가지 컬러와 느낌이 흡사하다고 했다.그의 고뇌의 골짜기에서 그려졌을 이 그림이 언뜻 보기엔 순진하고 예쁜 듯하지만, 볼수록 절망에서 나오는 희망과 치유의 흔적을 느낄 수가 있다. 이번 11월에 나오게 될 내 헨델 바이올린 소나타 한국판 CD의 커버로 넣을 계획이다.

항상 여행의 끝은 분주하다.

어쩐지 시간이 부족한 것같고, 못 다한 일들이 남은 것같아 아쉬워지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비가 많이 오는 동경시내를 빠져나오며 다시 곧 오고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네다 공항까지 바래다 주신 아마추어 리코더 연주자 아시노씨,바쁜 일정에 잠깐이라도 보자며 와서 밤과자 한 꾸러미를 주고 간 FM 라디오 진행자 노모또씨(그 밤과자를 먹어보니,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밤과자라니...다음에 가면 꼭 찾아서 사올 계획으로 봉지를 보관해 두었다!),그리고 여느 때처럼 웃는 얼굴로 시종일관 기분좋게 연습하고 함께 연주 한 쳄발리스트 오카다씨.

바쁜 와중에도 좋은 커피 맛보기 위해 찾아다니길 주저하지 않았던 몇 번의 소중한 순간들이 또한 즐겁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다.

"meditation" by Noriaki Ikeda

http://www.geocities.jp/art_ikeda_noriaki/

2009.11.1. 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