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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간의 시골길에서

입술을 깨물며 주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그래도 주님 뜻대로 살겠습니다."

이 사람은 이렇게,저 사람은 저렇게

잘 둘러진 장막안에서 재미롭게 즐기는 모양들이 부러웠습니다.

세련된 매너 속에서 흘러나오는 인본주의가 따뜻해 보였습니다.

누가 이 길을 쉽고 즐거운 길이라고 할 수있을까요?

쉽게 따라갈 수있는 길은

예쁘게 화장된 얼굴처럼 매력있어 보였습니다.

바로 오늘 밤

그 입술을, 그 눈가를 깨끗이 지웠을 때

그 모습은 정녕 드러날 것입니다.

영원과 합해진 삶, 영원과 연결되는 작은 선택들...

자꾸 재촉해 마지않는 요동하는 저에게는

실보푸라기만한 무게도 힘겹게 느껴지곤 합니다.

딱 한가지, 나를 위해 죽을 수 있으셨던 그 마음을 기억하면

알 수없는 수 많은 의문들을 가벼운 마음으로 미루어 둘 수있습니다.

지금 다 대답을 얻지 못한다해도

그 사랑에 안식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한 쪽은 주님을 의혹하고, 다른 구석은 원망을 하고 있어도

한가닥 저 뱃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소리는

" 하나님,그래도 주님의 뜻을 선택합니다"

내가 지나왔던, 아주 친숙해보이는 골목 모퉁이의 찻집에서 흐르는

옛노래를 들으며 저는 어두운 시간들을 그리워했읍니다.

그러나,그러나

하나님은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를 더욱 그리워하라" 하십니다.

오래 전,

일년 중 삼백일 정도를 멜빵달린 청바지만 입고 다니던 시절에 썼던 시 한편입니다.

연주 여행이 없을 때에는 시골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들을 탐험하며 자연과 책, 이것만 있으면 하루가 기뻤습니다.

수백번도 더 찾았을 미시간의 시골길에는 노을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길, 반딧불이 휘황하게 넘실대는 숲속 구석길,

개구리들이 가장 시끄럽게 울어대는 길등...

눈을 감아도 구석구석이 보일 정도로 익숙해진 길들이 항상 정답기 그지없었습니다.

눈이 오면 눈이 오는대로, 낙엽이 지면 낙엽이 지는대로,

아니 일년 중 모든 날이 다 저마다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가지고

나를 반겨주었던, 그곳이 저의 마음의 고향, 미시간의 시골길입니다.

연주여행이 없으면 대낮에 일어나 어슬렁 거리는 제게 친구가 되어 준 사람들은 은퇴해서 놀고있는 흑인 아줌마들,

혹은 갈 곳없는 미혼모등... 외로운 사람들과 가장 따뜻하고 다정한 시간들을 보냈던 시절이기도 합니다.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연주들을 할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이 곳을 떠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 시골길,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주는 자유함이 아직도 외롭지 않았던 것,

극도로 적막한 시간들 속에서 잠잠히 느끼던 기쁨들 때문이었습니다.

외국에 다녀오면 시간이 적응되기까지 다 잠든 한 밤중에 차를 몰고 또 시골길로 달려갑니다.

적막한 길 한 가운데서 헤드라이트를 꺼버리고 운전해 봅니다...

돌아오는 시내에 자동차가 한 대도 없는 시간에는 차선을 거꾸로 가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새벽 다섯시가 되면 동네에 오래된 아이스크림 가게가 문을 엽니다.

아침 잠 없는 할아버지들이 동트기 전부터 나와서 커피와 도넛을 시켜 먹고 계시고...

나는 가장 좋아하는 스위스초콜렛알몬드 아이스크림을 시킵니다....

다시 나를 힐끔 쳐다보고 아이스크림을 담아주는 아이에게... 지금 저녁 간식시간이야...하고 말합니다.

그 자유... 그 외로움... 참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했습니다.

1980년대 한국을 떠났을 때, 아니 유학길에 올랐을 때는 정치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교육의 수준에 대한 엄청난 회의,

그리고 그 교육의 너무나 많은 제약 속에서 타는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하던 예술 교육등에 대한 환멸에 지쳐있던 터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시기스발드 선생님 가족과 한국을 구석구석 여행 하던 때마다 선생님은 내 눈을 좀 더 크게 뜨게 해주시곤 했습니다.

한국의 시골, 재래시장, 옛 건물, 옹기종기 모여 땅바닥에 펼쳐 놓고 밥을 먹는 시골 사람들,

그들이 선듯 건네 주며 함께 먹자던 그 마음을 너무나도 기뻐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도,

나는 아직도 왜 미국에서 지내는가를 애써 설명하려했고,

선생님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가 왜 이렇게도 좋은가를 많이도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서로 양보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무섭게 질주하는 택시 안에서 내가 민망해하면,

남부 이태리 같아서 좋다시며, 제일 견딜 수없는 것은 너무나 조용하게 정리된 큰 도시라고 하셨습니다.

브뤼셀 근교의 선생님 댁 바로 옆에 작은 아파트를 물색해서 데려가 주시기까지 했던 말린 쿠이켄도

왜 내가 끝까지 유럽으로 이사를 오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없어했습니다.

그 때 나에게는 미시간의 시골, 너무도 적막한 외로움의 댓가로밖에는 살 수없었던 자유가 너무나도 소중했습니다.

이번연주 후에 제가 시기스발드 선생님께 말했습니다.

처음으로 한국을 떠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good!!"하고 크게 외치셨습니다.

선생님이라면 왜 미국에서 살지 않으실 것인지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 알고있습니다만...

영국에서 미국으로, 그리고 유럽에까지 파고 들어오고있는 상업주의...

콘서바토리들에까지 물들고 있는 예술의 상업주의,

그 데카당스가 주는 환멸,

그러나 그 종말이 가져 오고야 말, 오히려 새로운 시작에 대한 기대와 희망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생명의 끝과 영원에 대한 얘기도 많이 나누었습니다.

죽음이 영원에 이르는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선생님이 느끼시는, 다 타버린 재에 대하여.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재의 생명력에 대해서.

우리 생명의 끝인 한 줌의 재,

이 우주에서 없어지지 않을 오직 하나의 물질이 될 우리의 생명입니다.

나는 이번 연주에서 또 한번 내가 얼마나 많은 필요없는 것을 짊어지고 있는 소리를 내고 있는지에 대하여,

그리고 선생님 옆에서 듣기만 해도 얼마나 많이 깨닫게 되는지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많은 말이 필요없이, 선생님은 사랑과 격려를 온 몸으로, 그 행동으로 보여주시고 가셨습니다.

오늘,

잠깐이나 강한 만남을 늘 주시는 시기스발드 선생님과의 시간을 다시 기억하며.

한국의 관객들, 음악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깊이 전해드리고 싶은 그 분의 영감,사랑에 대해 생각합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우리에게 이런 시간들이 주어지게 될지...

유럽에서 연주 할때에도 가끔 동료들과 얘기하곤 합니다.

어쩌면 수십년의 시간이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항상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그토록 참된 마음을 만질 수있는 예술 혼을 자주 보지 못하는데서 오는

제 자신의 기우입니다.

그 선생님의 사랑 안에 여러분들이 있습니다.

2011.10.04 김진